본 콘텐츠는 대한체육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에서 발췌 되었습니다.
그녀의 포효에 경기를 지켜보던 모두가 전율했다. 펜싱 국가대표 윤지수 선수는 지난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치열한 접전 끝에 여자 개인전 금메달을 획득했다. 수년간 그녀를 괴롭혀 온 무릎 부상도 승리를 향한 윤지수 선수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역전의 16강전부터 세계랭킹 12위 사오야치와의 결승전까지 그녀가 내딛는 걸음 하나. 그녀가 내지르는 공격 하나가 모두 눈부시게 빛났다.
나를 사로잡은 사브르의 매력
이른 아침부터 훈련에 박차를 가하는 서울 모처의 펜싱 트레이닝 센터. 펜싱 국가대표 윤지수 선수 역시 동료들과 함께 훈련에 매진하며 다음 경기를 준비 중이다. 윤 선수는 다가올 7월에 있을 파리올림픽을 대비해 전지훈련과 각종 국제대회 출전으로 나날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사브르의 여제’라는 타이틀이 당연할 만큼 이제는 많은 사람이 ‘사브르하면 윤지수 선수를 떠올리지만, 그녀가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펜싱 선수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것은 이미 너무 유명한 이야기. 이 일화 꺼내자, 윤 선수는 민망한 듯 작게 웃었다. 프로 스포츠인으로서 먼저 그 길을 걸으며, 스포츠인의 삶이 결코 녹록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윤학길 선수였기에 누구보다도 딸의 행복을 바라는 아버지로서 딸의 꿈을 마냥 응원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윤지수 선수의 남다른 재능은 그녀를 운명처럼 스포츠의 세계로 이끌었다. 윤 선수는 어린 나이였지만 자신이 좋아하고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뚜렷이 알고, 스스로에 대한 충분한 확신으로 아버지를 설득했고 그렇게 사브르를 잡았다. 윤학길의 딸이 아닌 윤지수의 아버지가 더 많이 회자되는 지금, 이제는 윤 선수에게 부모님은 그 누구보다도 큰 힘이 되어주고 있다. 윤지수 선수의 주 종목인 사브르는 여타 펜싱 종목에 비해 일찍 판가름이 나는 경기다. 플뢰레나 에페와 달리 공방이 빠르고 치열해 일반 관중들은 경기를 쫓기 버거울 정도다. 윤 선수 역시 ‘박진감’을 사브르의 매력으로 꼽았다.
“사브르는 단시간 내에 결판이 나는 박진감 넘치는 경기라고 생각해요. 시간제한이 없고 점수를 채워야지만 끝나는 종목이어서 이기고 있다가도 질 수 있고, 크게 지고 있어도 승부를 뒤집을 수 있어요.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닌 스포츠인 거죠`’ 윤 선수의 말처럼 그녀가 보여준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 여자 사브르 개인전 16강은 역전의 묘미가 드러난 시합이었다. 우리에게 희열을 선사한 16강 경기와 우즈베키스탄의 자이나브 다이베코바 선수와 각축을 벌였던 준결승을 지나 금메달에 점점 가까워지던 그때, 중국의 사오야치 선수와의 결승을 앞둔 윤 선수의 심경은 어땠을까. "승패를 떠나서 부상 속에서도 결승전에 오를 수 있었다는 말에 감사했어요. 그래서 꼭 금메달을 따야겠다는 마음보다는 일단 더 이상 다치지 않고 경기에 집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 컸어요`’ 그렇게 오로지 시합에만 몰두한 결과, 승리의 여신은 그녀의 손을 들어주었다. 금메달을 따고 난 후에는 ‘드디어 끝났다’라는 안도감이 제일 컸다고 금메달리스트가 된 윤 선수의 소식을 누군가는 TV 중계로, 누군가는 기사로 접했지만, 그녀의 감격과 벅찬 기쁨만큼은 모두 하나 같이 느낄 수 있었다.
오롯한 승부의 세계
스포츠인에게 슬럼프는 한 번쯤은 반드시 거쳐 가야 할, 피할 수 없는 숙명일 것이다. 윤지수 선수 역시 슬럼프에 빠졌던 때가 있었다. 어떤 이에게는 짧지만, 강한 태풍처럼, 어떤 이에게는 가늘고 긴 꽃샘추위처럼 다가오는 슬럼프의 매서움이 윤 선수에게는 몇 년 주기로 덮쳐오는 해일처럼 굴곡지게 찾아왔다. 슬럼프를 극복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양하겠지만 윤지수 선수는 극복하려고 애써 노력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조급해하지 않고 본인이 잘했던 경기부터 하지 못했던 경기까지의 영상을 모두 찾아봤다고 “제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쭉 보면서 제가 잘했던 느낌을 찾으려고 노력했어요. 자신에 대한 분석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당시에 바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었고, 이후에 자연스레 서서히 페이스가 돌아왔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까 영상을 보면서 나를 분석하던 마음가짐이나 태도들이 제가 슬럼프에서 빠져나오는 데 도움이 됐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윤 선수는 스스로 너무 채찍질하는 편이라 거기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조금 든다고 밝혔다. 평소 운동을 잘하는 것, 국가대표 선수로서 좋은 성적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삶을 다른 쪽에서 바라봤을 때 조금 여유롭고 행복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는 것이 그녀의 솔직한 마음이었다. 그렇게 나름의 방법으로 내면을 성장시켜 온 윤지수 선수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모두 훌륭한 성적을 보여주는 윤 선수지만 단체전에 임하는 마음가짐은 특히 다르다. 온전히 나만의 것인 개인전과 달리 단체전은 모두와 함께하는 시합이기 때문에 더 부담도 되고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단체전이나 개인전을 떠나서, 결국 펜싱은 혼자 올라가서 하는 경기예요. 그래서 매 시합에서 상대와의 게임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하죠`’ 펜싱 피스트 위에서 자세를 잡고 선 선수들이 유독 빛나 보이는 이유는, 이렇듯 역경을 이겨내고 상념을 버린 채 오롯이 상대를 향한 일격에 최선을 다하기 때문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