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콘텐츠는 대한체육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에서 발췌 되었습니다.
2024 파리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최초 여자 복싱 동메달리스트가 된 임애지 선수. 복싱을 향한 그의 순수한 사랑과 열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다른 복싱 경기를 더 찾아보게 만든다. 임애지 선수가 일으킨 작은 돌풍. 대한민국 여자 복싱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나 선수 될게, 그럼 안 그만둬도 되지?
여자 복싱 선수들에게 언제부터 복싱을 시작했냐고 질문하면 대부분의 선수가 ‘중학생 때’라고 답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운동을 시작해 고학년이 되면 유소년 대회에서 정식 선수로 데뷔하는 여타 종목보다 사뭇 늦은 시기다.
지금은 전국 규모의 대회에서 중등부 여자 복싱 경기도 치러지고 있지만, 임애지 선수가 중학생일 때만 해도 중등부 대회에 여자 선수 경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여자 복싱에 대한 인지도가 낮았고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대회 출전 자격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여자 복싱 선수 발굴과 육성도 대부분 중학생 시기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임애지 선수 역시 본격적으로 복싱 선수를 지망하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이지만, 그가 복싱과 처음 마주한 시절은 그보다 조금 앞선다. 임애지 선수의 연고지인 화순에서는 해마다 자체적으로 소규모 복싱 대회를 개최하는데, 어릴 적 우연히 이 대회를 관람하고 복싱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린 것이다.
화순군 '임애지복싱체육관에서 만난 임애지 선수. 링 안에서는 매서운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복싱 국가대표지만, 링 밖에서는 한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복싱 마니아였다.
임애지 선수는 그때부터 자발적으로 집 근처 복싱 체육관을 찾아보고 부모님을 설득해 운동을 배우기 시작했다. 복싱을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땐 집에 돌아와 부모님 앞에서 그날 배운 운동을 선보였다고 회상하는 그의 말에서 복싱을 향한 애정이 듬뿍 묻어났다. “처음부터 선수가 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저는 그냥 복싱이 재밌어서 체육관에 계속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부모님이 특별히 다이어트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선수가 될 것도 아니니 이제 그만하면 어떠냐고 하시는 거예요. ‘나는 여전히 재밌는데, 왜 그만두라고 하는 거지?’ 부모님이 보실 땐 목적 없이 운동하는 것 같았나 봐요. 그래서 ‘나 선수 될게, 그럼 안 그만둬도 되지?’라고 말했어요. 전 여전히 너무 재밌고, 복싱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거든요.”
취미 운동이 아닌 선수로의 전향.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을 것 같다는 섣부른 예상과 달리 임애지 선수의 가족은 한결같이 무한한 응원과 지지를 보낸다.
“한번은 운동하다가 얼굴에 상처가 난 적이 있어요. 한 소리 하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넌 어떻게 했어?’라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때 타박하셨으면 움츠러들었을 것 같은데, ‘다음엔 더 잘 해봐’라고 격려해 주신 덕분에 부담 없이 편하게 운동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나를 알고 적을 알면 두렵지 않다
2024 파리올림픽에서 임애지 선수의 16강과 8강 경기는 한국 시각 새벽 4시경, 파리 현지 시각으로는 밤 9시경에 진행됐다. 복싱은 오전, 오후, 야간 세 개의 세션으로 나뉘어 진행됐는데 하필 야간 경기 시간이 걸린 탓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계체에 응한 뒤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하루 종일 대기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초조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오히려 임애지 선수는 긴장은커녕 빨리 경기를 치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사실 임애지 선수는 시합 직전까지도 초조해하지 않는 편이다. 너무 풀어져 있는 것보다 약간의 긴장감을 가진 상태가 더 좋은 컨디션이라고 생각해 일부러 긴장하려 노력할 정도라고.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 자웅을 겨루는 올림픽 무대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자신감의 원천이 대체 무엇인지 들여다보니, 그 기저에는 치밀하고 냉철한 분석과 전략이 깔려 있었다.
“저는 ‘상대 선수에 비해서 내가 더 잘하는 것은 무엇인지’, ‘특기 기술을 만들기 위해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는지’ 같은 분석 작업을 굉장히 좋아해요. 상대 분석은 40%만 하고 나머지 60%는 ‘나’에 대한 분석이에요. 어떤 필승전략을 세웠는데 제가 그 전략을 실행할 준비가 안 된 상태면, 전략을 세우는 게 무의미한 거죠. 또 상대 분석에만 너무 골몰하면 그 선수가 잘난 것만 보여서 제가 작아져 버려요. 그래서 상대에 대한 분석은 어느 정도만 하고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계속해요.”
임애지 선수는 복싱에 있어서 본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전략’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아무리 대비책을 철저하게 세운다고 해도 다음 시합에서는 상대 선수가 이전과 다른 경기를 펼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임애지 선수는 플랜B를 만들기 시작했다. 플랜B를 만들어 두면 경기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대표팀 한순철 코치 또한 꼼꼼한 분석이 임애지 선수의 큰 장점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시합이 끝나면 임애지 선수는 자신이 먼저 지난 경기를 모니터링하고 자료를 만든다. 이 초안을 토대로 한순철 코치와 논의하며 한 번 더 경기를 복기하는데, 제대로 분석했다며 칭찬받을 때도 있고 보다 나은 방향을 제시받을 때도 있다. 선수 입장에서는 시간을 두 배로 투자해야 하는 일이지만 이 과정이 임애지 선수에겐 모두 즐거움이다. 덕분에 그의 경기력은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훌쩍 성장했다.
“경기를 기다리면서 머릿속으로 제가 세운 전략을 계속 상상하다 보면 기분 좋은 떨림이 느껴져요. 저는 이 떨림을 경기를 제대로 못 할까 봐 걱정되는 긴장감이 아니라 제가 계획한 대로 경기를 펼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서 오는 설렘이라고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훈련이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복싱이 재밌는 임애지 선수는 더 많은 사람이 복싱의 매력이 빠져들길 바란다.
최근 라이트급으로 전국체육대회를 치른 그는 다시 밴텀급으로 감량하며 내년도 국가대표 선발전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