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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히어로

2024년 10월 스포츠히어로
세상을 바꾸는 스트레이트
복싱
임애지 선수
선수사진
본 콘텐츠는 대한체육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에서 발췌 되었습니다.
2024 파리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최초 여자 복싱 동메달리스트가 된 임애지 선수. 복싱을 향한 그의 순수한 사랑과 열정은 보는 이로 하여금 다른 복싱 경기를 더 찾아보게 만든다. 임애지 선수가 일으킨 작은 돌풍. 대한민국 여자 복싱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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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선수 될게, 그럼 안 그만둬도 되지?

여자 복싱 선수들에게 언제부터 복싱을 시작했냐고 질문하면 대부분의 선수가 ‘중학생 때’라고 답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운동을 시작해 고학년이 되면 유소년 대회에서 정식 선수로 데뷔하는 여타 종목보다 사뭇 늦은 시기다.
지금은 전국 규모의 대회에서 중등부 여자 복싱 경기도 치러지고 있지만, 임애지 선수가 중학생일 때만 해도 중등부 대회에 여자 선수 경기가 존재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여자 복싱에 대한 인지도가 낮았고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대회 출전 자격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에 여자 복싱 선수 발굴과 육성도 대부분 중학생 시기부터 시작될 수밖에 없었다.
임애지 선수 역시 본격적으로 복싱 선수를 지망하게 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이지만, 그가 복싱과 처음 마주한 시절은 그보다 조금 앞선다. 임애지 선수의 연고지인 화순에서는 해마다 자체적으로 소규모 복싱 대회를 개최하는데, 어릴 적 우연히 이 대회를 관람하고 복싱에 완전히 매료되어 버린 것이다.
화순군 '임애지복싱체육관에서 만난 임애지 선수. 링 안에서는 매서운 눈빛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복싱 국가대표지만, 링 밖에서는 한없이 귀엽고 사랑스러운 복싱 마니아였다.
임애지 선수는 그때부터 자발적으로 집 근처 복싱 체육관을 찾아보고 부모님을 설득해 운동을 배우기 시작했다. 복싱을 막 배우기 시작했을 땐 집에 돌아와 부모님 앞에서 그날 배운 운동을 선보였다고 회상하는 그의 말에서 복싱을 향한 애정이 듬뿍 묻어났다. “처음부터 선수가 되려던 것은 아니었어요. 저는 그냥 복싱이 재밌어서 체육관에 계속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부모님이 특별히 다이어트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선수가 될 것도 아니니 이제 그만하면 어떠냐고 하시는 거예요. ‘나는 여전히 재밌는데, 왜 그만두라고 하는 거지?’ 부모님이 보실 땐 목적 없이 운동하는 것 같았나 봐요. 그래서 ‘나 선수 될게, 그럼 안 그만둬도 되지?’라고 말했어요. 전 여전히 너무 재밌고, 복싱을 그만두고 싶지 않았거든요.”
취미 운동이 아닌 선수로의 전향. 부모님의 반대가 심했을 것 같다는 섣부른 예상과 달리 임애지 선수의 가족은 한결같이 무한한 응원과 지지를 보낸다.
“한번은 운동하다가 얼굴에 상처가 난 적이 있어요. 한 소리 하실 줄 알았는데 오히려 ‘넌 어떻게 했어?’라고 물어보시더라고요. 그때 타박하셨으면 움츠러들었을 것 같은데, ‘다음엔 더 잘 해봐’라고 격려해 주신 덕분에 부담 없이 편하게 운동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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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알고 적을 알면 두렵지 않다

2024 파리올림픽에서 임애지 선수의 16강과 8강 경기는 한국 시각 새벽 4시경, 파리 현지 시각으로는 밤 9시경에 진행됐다. 복싱은 오전, 오후, 야간 세 개의 세션으로 나뉘어 진행됐는데 하필 야간 경기 시간이 걸린 탓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계체에 응한 뒤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하루 종일 대기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초조했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오히려 임애지 선수는 긴장은커녕 빨리 경기를 치르고 싶은 생각뿐이었다고 웃으며 말했다.
사실 임애지 선수는 시합 직전까지도 초조해하지 않는 편이다. 너무 풀어져 있는 것보다 약간의 긴장감을 가진 상태가 더 좋은 컨디션이라고 생각해 일부러 긴장하려 노력할 정도라고. 내로라하는 실력자들이 자웅을 겨루는 올림픽 무대에서도 주눅 들지 않는 자신감의 원천이 대체 무엇인지 들여다보니, 그 기저에는 치밀하고 냉철한 분석과 전략이 깔려 있었다.
“저는 ‘상대 선수에 비해서 내가 더 잘하는 것은 무엇인지’, ‘특기 기술을 만들기 위해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는지’ 같은 분석 작업을 굉장히 좋아해요. 상대 분석은 40%만 하고 나머지 60%는 ‘나’에 대한 분석이에요. 어떤 필승전략을 세웠는데 제가 그 전략을 실행할 준비가 안 된 상태면, 전략을 세우는 게 무의미한 거죠. 또 상대 분석에만 너무 골몰하면 그 선수가 잘난 것만 보여서 제가 작아져 버려요. 그래서 상대에 대한 분석은 어느 정도만 하고 스스로에 대한 평가를 계속해요.”
임애지 선수는 복싱에 있어서 본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전략’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아무리 대비책을 철저하게 세운다고 해도 다음 시합에서는 상대 선수가 이전과 다른 경기를 펼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래서 임애지 선수는 플랜B를 만들기 시작했다. 플랜B를 만들어 두면 경기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대표팀 한순철 코치 또한 꼼꼼한 분석이 임애지 선수의 큰 장점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시합이 끝나면 임애지 선수는 자신이 먼저 지난 경기를 모니터링하고 자료를 만든다. 이 초안을 토대로 한순철 코치와 논의하며 한 번 더 경기를 복기하는데, 제대로 분석했다며 칭찬받을 때도 있고 보다 나은 방향을 제시받을 때도 있다. 선수 입장에서는 시간을 두 배로 투자해야 하는 일이지만 이 과정이 임애지 선수에겐 모두 즐거움이다. 덕분에 그의 경기력은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훌쩍 성장했다.
“경기를 기다리면서 머릿속으로 제가 세운 전략을 계속 상상하다 보면 기분 좋은 떨림이 느껴져요. 저는 이 떨림을 경기를 제대로 못 할까 봐 걱정되는 긴장감이 아니라 제가 계획한 대로 경기를 펼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서 오는 설렘이라고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훈련이 힘들 때도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복싱이 재밌는 임애지 선수는 더 많은 사람이 복싱의 매력이 빠져들길 바란다.
최근 라이트급으로 전국체육대회를 치른 그는 다시 밴텀급으로 감량하며 내년도 국가대표 선발전을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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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더와 라이트의 숲을 지나 밴텀의 무대로

임애지 선수는 두 번의 올림픽을 치렀다. 생애 처음으로 도전했던 2020 도쿄올림픽은 그에게 쓰라린 패배의 맛을 안겨주었다.
“도쿄올림픽이 끝난 뒤에는 정말 은퇴하고 싶었어요. 한 2년 정도 슬럼프에 갇혀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 조금씩 회복되면서 ‘나는 왜 안 되지, 뭐가 문제일까’라고 끝없이 질문했어요.”
이전부터 체급을 변경해 보라는 권유는 계속 받아 왔지만, 임애지 선수는 전국체육대회에 없는 체급에 도전해야 하는 당위성을 찾지 못해 선뜻 움직일 수 없었다. 그랬던 그가 마음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임애지 선수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객관적인 자기 평가에 근거한 결정이었다고 설명했다.
“제가 페더급(-57kg)에서는 키가 작은 편이에요. 부족한 피지컬을 커버할 만큼 월등한 파워가 있거나 스피드가 엄청 좋은 것도 아니고요. 제 수준과 신체 조건을 객관적으로 판단했을 때 이기기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파고 들어가는 경기를 해야 하는데 그건 힘들겠다고 생각했어요.”
어떤 사안을 분석하고 사실에 근거해 정확히 판단하는 것을 선호하는 임애지 선수는 본인의 복싱에 대해서도 예외가 없었다. 그는 나라별 페더급 선수들을 전부 늘어놓고 ‘내가 이 선수를 만나면 얼마의 확률로 이길 수 있을까?’라고 평가해 보았다. 절반 이상을 자신 있게 이겨야 금메달을 바라볼 수 있는데 그의 판단으로는 가능성이 작았다.
“선수들 경기력을 분석하면서 ‘잘하면 동메달은 딸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너무 슬픈 거예요. 내가 최선을 다해도 이룰 수 있는 최고점이 금메달이 아닌 동메달이면 운동하는 게 너무 힘들 것 같았어요. 체급을 내리면 적어도 피지컬 차이는 없앨 수 있으니 한번 도전해 보자고 결심했죠.”
2020 도쿄올림픽에서 페더급(-57kg), 2022 항저우아시안게임에서 밴텀급(-54kg), 2023 전국체육대회에서 라이트급(-60kg)으로 출전한 그는 체급을 바꿔도 메달을 얻지 못하자 선수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실패에 좌절하지 않기로 했다. 부족한 훈련을 채우고 모자란 전략을 보완했다. 절치부심하여 다시 한번 밴텀급으로 2024 파리올림픽 메달 사냥에 나선 임애지 선수는 마침내 ‘대한민국 최초 여자 복싱 동메달리스트’라는 영예를 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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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 복싱 메달리스트의 책임감

“저한테 관심 가져 주시는 것들이 신기하기도 하고 많이 감사하죠. 그러면서 책임감을 가져야겠다는 마음도 드는 것 같아요.”
하계올림픽에서 12년 만에 탄생한 대한민국 복싱 메달리스트 임애지 선수가 다시금 대한민국 복싱을 부흥시켜 효자 종목으로서의 위상을 되찾아 줄 거라는 주변의 기대가 크다. 2020 도쿄올림픽 때는 메달을 소원하던 대중의 기대와 실망 속에서 힘들어하기도 했지만, 대중의 마음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로는 부담은 내려놓고 선수로서 책임 있게 훈련에 임하는 중이다.
최근에는 국내 여자 복싱 대회 체급 세분화에 대한 소신을 밝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임애지 선수는 실력 있는 우리나라 여자 복싱 선수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지 못하고 묻히는 가장 큰 이유로 그들이 활약할 체급의 대회가 없다는 점을 꼽았다.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고 서로 끊임없이 경쟁하는 구도가 돼야 대한민국 복싱이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선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개최되지 않았던 복싱 여자 중등부 대회가 10여 년이 지난 지금은 활발히 개최되고 그 영향으로 복싱을 배우는 초등학생이 점차 늘어나는 것처럼, 여자 복싱 체급 세분화도 조만간 이루어져 더 많은 선수가 날개를 펼치리라 기대를 품는다.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해요. 저보다 잘하는 선수들, 미래를 빛내 줄 후배들이 정말 많아요. 이번에는 12년 만에 메달을 땄지만, 다음 메달은 4년 뒤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서 바로 나올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저를 향한 관심과 제가 느끼는 이 부담감은 딱 지금뿐이라 생각해요. 분명 머지않아 다른 선수들이 받아 갈 테니까 지금은 즐기려고 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임애지를 보고 복싱에 입문하게 됐지만 우리나라에 이렇게 잘하는 선수들이 많구나’라는 걸 알게 돼서 더 많이 응원해 주시면 좋겠어요.”
대한민국 복싱의 발전을 위해 선수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은 올림픽에서 메달을 쟁취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국가대표 임애지 선수. 앞으로도 복싱계에 변화의 바람을 일으킬 임애지 선수의 힘 있는 스트레이트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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