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콘텐츠는 대한체육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에서 발췌 되었습니다.
시니어 데뷔 2년 만에 ISU 쇼트트랙 월드컵에서 랭킹 1위를 달성하며 크리스털 글로브를 수상한 뉴에이스 김길리 선수. 연일 계속되는 경기에도 실력자들과 겨루며 성장한다는 기쁨에 매 순간이 즐겁다. 차세대 쇼트트랙 스타로 발돋음 중인 그가 다가오는 올림픽을 향해 스퍼트를 올린다.
은반 위의 요정 말고 트랙 위의 걸크러시
김길리 선수와 쇼트트랙의 인연은 조금 귀엽고 엉뚱하게 시작됐다. 어릴 적부터 몸을 움직이는 활동을 좋아했던 그는 다양한 운동을 경험해 보며 적성을 찾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머니 친구의 딸이 피겨 스케이팅을 배운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견학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 빙상장 위를 아름답게 수놓는 피겨 스케이팅을 보고 스케이팅에 관심이 생겼다. 어머니는 곧바로 딸의 마음에 응답해 수업을 등록해 주었고,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김길리 선수는 난생처음 스케이트화를 신게 되었다. 그렇게 빙상장을 다닌 지 한 달, 우아한 피겨 선수의 모습을 상상하며 스케이팅을 배우던 김길리 선수는 문득 무언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어느 순간 지금 배우는 게 피겨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피겨를 하려면 점프나 스핀 같은 동작을 해야 하는데 제가 배우는 스케이트는 이상하게 점점 자세가 낮아지는 거예요. 저희는 직선 주행을 찍기라고 하는데, 찍기를 배울 때쯤 뭔가 다르다는 걸 알았던 것 같아요. 그래서 엄마한테 이거 피겨 맞냐고 물어보니까 쇼트트랙이라고 하시더라고요."
당시에는 피겨 스케이팅을 가르치는 곳이 흔치 않았다. 그런데 마침 김길리 선수의 집 근처였던 한국체육대학교 빙상장에서 여름방학을 맞아 쇼트트랙 강습을 열었고, 어머니는 스케이트를 배우고 싶어 하는 딸을 위해 해당 수업을 등록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길리 선수는 쇼트트랙이라는 종목을 알지도 못했다. 빙상장에 다닌 지 불과 한 달, 피겨 스케이팅으로 전향하기에 늦지 않은 때였지만 그는 쇼트트랙을 선택했다.
“저는 처음부터 스케이트를 잘 탔어요. 재능이 좀 있었나 봐요. 원래는 피겨를 배우고 싶었지만, 쇼트트랙에 금방 흥미를 느껴서 그냥 이대로 계속 스케이트를 타고 싶었어요. 트랙을 질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아, 나도 빨리 저렇게 타고 싶다’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런 그의 사랑스러운 바람은 머지않아 이뤄졌다. 같은 해 출전했던 아마추어 대회에서 곧바로 1등을 차지한 것.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우승했을 때의 짜릿함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이 대회를 시작으로 김길리 선수는 각종 주니어 대회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며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남다른 재능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노력이 더해지자 김길리 선수를 따라올 자가 없었다.
어려워서 더 재밌는 시니어 무대
하지만 너무 일찍 재능을 꽃피웠기 때문일까. 김길리 선수의 월등한 실력은 오히려 그의 성장에 독이 되기도 했다. 쇼트트랙은 다른 선수와의 치열한 경쟁이 매력인 종목 중 하나인데,
대적할 만한 라이벌이 없다 보니 조금씩 재미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언제나 1등만 했던 것이 오히려 싫증을 느끼게 만든 것 같다며, 때때로 쇼트트랙을 멀리하기도 했다고 소회했다.
"중간에 몇 번 그만뒀다가 다시 시작하기도 했어요. 그때마다 부모님은 ‘자기 재능을 찾는 게 얼마나 힘든 줄 아니? 네 재능을 믿고, 기왕 시작한 거 한 번 끝을 봐’라고 하시며 응원해 주셨어요. 부모님은 제가 스케이트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아셨던 것 같아요." 딸을 향한 흔들림 없는 믿음이 있었기에, 부모님은 김길리 선수가 잠시 운동을 쉬더라도 채근하지 않았다. 그러다 김길리 선수가 빙상장을 그리워할 때쯤이면 가볍게 툭, ‘스케이트 탈래?’ 라며 다시 운동을 권했다. 그래서 김길리 선수는 주니어 시절보다 지금이 훨씬 즐겁다고 이야기 한다. 매 시합마다 새로운 문이 열리기 때문이다. 2023/24 시즌으로 국제 시니어 무대에 발을 내디딘 그는 이제 실전 경험이 풍부한 전 세계 선수들과 어깨를 견주며 트랙을 달린다. 대한민국 쇼트트랙의 맏언니 최민정 선수와 이탈리아의 아리아타 폰타나 선수는 김길리 선수가 롤모델을 이야기할 때 빼놓지 않는 사람들이다. 두 선배를 비롯한 수많은 선수와 함께 그동안 경험해 보지 못했던 다채로운 레이스를 겪으며 새로운 배움을 얻고, 그는 매일매일 한 뼘 더 성장해 나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