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콘텐츠는 대한체육회에서 발행하는 월간지
에서 발췌 되었습니다.
2025 토리노동계세계대학경기대회(이하 '토리노대회")에서 수많은 빙상 메달리스트가 배출되는 동안 슬로프를 날렵하게 가로지르며 당당히 은메달을 목에 건 눈밭의 히어로가 있다. 바로 스노보드 알파인 마준호 선수. 오랜 노력 끝에 드디어 국가대표로 우뚝 선 그가 쟁쟁한 실력의 선배들로부터 바통을 이어받아 스노보드의 미래를 밝히기 위한 도전에 나선다.
드디어 올라선 국가대표의 자리
많은 운동선수가 그러했듯 마준호 선수도 시작은 취미였다.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부모님을 따라 강원도로 오게 된 그는 평창 면온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처음 스노보드를 접했다. 학교에서 보드부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심심해서 형들을 따라 보드부에 놀러 갔다가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어린 나이였지만 도 대회에서 입상도 할 정도로 재능을 보였던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다시 한번 횡성으로 연고를 옮겼고, 설상 종목 선수를 활발히 육성 중인 둔내에서 쭉 성장하며 전문 선수로 한 걸음 더 다가섰다.
마준호 선수가 본격적으로 전문 선수로 진로를 결정한 시기는 중학교 3학년 때였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늘 그랬듯 습관처럼 스노보드를 타던 어느 날, 문득 그의 가슴 속에 좀 더 잘하고 싶다는 바람이 움텄다.
“그전까지는 주변 사람들이 다 보드를 타고 있으니까, 나도 스노보드부에 가입되어 있으니까, 때마침 학생 선수로 등록되어 있으니까 대회에도 나가고 시도 뛴다는 느낌이 컸어요. 그런데 중학교 3학년이 되고 나서부터는 ‘아, 뭔가 좀 더 잘하고 싶다.',’대회에서 1등 하고 싶다‘ 라는 열망이 강력하게 생겨서, 그때부터 목표를 세우고 체계적으로 운동하면서 스노보드에 집중하기 시작했어요.”
본격적으로 운동선수의 길을 걷기 시작한지 3년, 고등학교 2학년이 된 그는 국가대표 상비군이 되었다. 하지만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길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국체육대학교에 진학하는 동안 꾸준히 운동에 매진했음에도 그는 오랫동안 상비군에 머물러야 했다. 대학교 3학년을 목전에 둔 2022/23 시즌에 찾아 온 슬림프 아닌 슬럼프는 그의 선수 생활을 더욱 힘겹게 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운동에 대한 생각을 환기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보드가 너무 안 타지는데 뭐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이렇게 말하면 조금 이상한데, 그래서 저는 좀 내려놨어요. 아예 운동을 안 하고 시합도 안 나가고 그랬던 건 아니고요, 조급함을 좀 덜어 내자는 생각으로 마음을 편하게 먹었어요. 당시에는 그냥 ’못하면 뭐 어때‘라는 생각이 컸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운동선수는 1등을 바라보면서 노력하잖아요. 그런데 그런 강박들에서 벗어나게 되니 다시 도약할 수 있는 힘이 생기지 않았나 생각이 들어요.“
과도한 긴장과 압박은 유연한 몸도 굳어 버리게 하고 영민한 판단도 흐려지게 만든다. 어린 시절 마냥 눈밭을 즐겼을 때처럼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스노보드에 오르니 불필요한 힘이 빠지면서 훨씬 자유롭게 슬로프를 누비게 된 것이 아닐까? 지난 2024년, 마준호 선수는 드디어 스노보드 알파인 국가대표 자격을 얻었다. 상비군이 된 지 5년 만의 결과였다. 국가대표 명단에서 이름을 확인했을 때 '드디어 됐구나'라는 뿌듯함에 가슴이 한껏 벅차올랐다.
"선수로서 최종 목적지가 올림픽 금메달이라고 한다면, 국가대표가 되는 일은 그 목표를 향한 큰 한 걸음이기 때문에 '마침내 됐다!’라는 기쁨에 일주일 동안 정말 행복했습니다.“
어떤 상황에도 대응할 수 있도록. 연습 또 연습
스노보드 알파인은 평행회전과 평행대회전으로 나뉜다.
두 경기 모두 주행 코스에 평행하게 설치된 기문을 차례로 통과해 결승점 도달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각 기문 간 거리가 평행회전은 10~14m, 평행대회전은 20~25m이라는 차이가 있다. 두 명의 선수가 동시 출발하며 1차전과 2차전 기록을 합산하여 빠른 순서대로 순위가 결정된다.
야외에서 경기가 펼쳐지는 특성상 선수들은 많은 변수에 대응해야 한다. 평행회전 및 평행대회전 코스는 세계 대회 규정에 따라 대회가 열리는 국가의 코치들이 설치하는데, 제시된 범위 안에서 코스 길이나 기문 간의 거리를 자유롭게 설정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설치하는 사람에 따라서, 슬로프 상태(설질, 雪質)나 당일 날씨에 따라서 코스의 난도가 매번 다르다. 어떤 경기 조건이 주어지더라도 당황하지 않고 최고의 기량을 보여 주기 위해서는 숱한 연습을 통해 다양한 선택지를 구성해 두는 일이 필요하다.
"특기요? 딱히 생각해 본 적 없기는 한데·?? 실수가 생겼을 때 리커버리(회복) 하는 게 좀 빠른 것 같아요. 연습할 때 어떠한 상황이 되더라도 리커버리를 하려고 노력하는데, 그런 게 쌓이고 쌓이다 보면 시합 때도 어떻게 만회해야 할지 바로 바로 해답이 떠오르는 것 같아요."
회전할 때 보드가 매끄럽게 돌아가지 않고 떨린다거나, 보드 앞이나 뒤쪽 엣지가 눈에서 빠져나와 헛돈다거나 하는 자잘한 실수는 안정적인 경기 운용에 영향을 미친다. 이런 실수를 바로바로 잡지 못하면 결국 넘어짐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어떤 방법으로 회복해 다음 턴을 이어갈지 판단하는 것이 경기력을 좌우한다. 마준호 선수는 보통 평행회전과 평행대회전 두 종목 모두 고르게 훈련해 왔는데, 최근에는 평행대회전 연습에 더 주력하고 있다. 지난 시즌까지는 평행회전을 더 잘했지만 이번 시즌에는 평행대회전 기록이 훨씬 좋아져 자신감이 한껏 붙었다고.
비슷한 듯 다른 두 종목을 소화할 때 선수 입장에서 느끼는 가장 큰 차이는 무엇일까? 마준호 선수는 아무래도 ‘리듬’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평행대회전은 평행회전에 비해 보드 길이도 길고, 기문 간의 거리도 멀어서 다음 턴은 어떻게 하면 좋을지 판단할 시간이 있어요. 그런데 평행회전은 기문 사이 거리가 짧으니까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데, 그런 부분에서 반사적으로 대응하는 동물적인 감각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그는 주행 중 '생각할 시간이 조금 더 많다'라고 담담히 대답했지만, 사실 국가대표 선수들이 약 500m의 코스를 내려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30초 내외다. 계산해 보면 각 기문을 통과할 때 선수에게 주어지는 시간은 고작 1~2초 남짓인 셈이다. 마준호 선수를 비롯한 수많은 국가대표 선수가 우리가 눈 한 번 깜빡하는 순간을 쪼개고 쪼개어 메달을 만들어 내고 있다.